나에게 포토샵과 일러스트는 항상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당장의 일들에 밀려 배우지 못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배우려면 충분히 배울 수 있었겠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나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 포토샵, 일러스트 툴을 배울 시간과 힘을 내게 되었다. 퇴사 후 월화수목일요일, 주5일을 나가며 익힌 이 프로그램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왜 진작 배우지 않았나 몰라.

 기초적인 포토샵과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 이 프로그램을 조금 더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수업이 태블릿을 이용한 수업이었다. 원래 사람이 행동력이 있으려면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나는 수업을 듣기 전 재빠르게 가장 저렴하면서 입문자용으로 추천하는 와콤인튜어스 CTL-4100 타블렛도 주문했다.  

마음은 아이패드 3세대를 구입하고 싶었으나, 현실과 타협했다. 하지만 9만원의 값어치를 톡톡히 해내고 있는 내 첫 태블릿 와콤 인튜어스 CTL-4100.
‌여자 손 2개를 합친 아기자기한 크기‌이지만 기능을 사용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고, 크기가 작기 때문에 오히려 들고다니기 편하다.  

 장비까지 완벽하게 구비하고 나니 자신감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디지털 드로잉을 할 모든 준비가 끝났군. 완벽해.' 하지만 자신감으로 충만하던 자세는 타블렛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타블렛을 이용한 수업이기 때문에 포토샵과 타블렛의 기능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수업은 80%가 미술이론수업으로 진행되었다. 인체구도 잡는 법, 빛이 들어올 때 그림자 생기는 방향, 소실점, 입체감 나타내는 법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치 학창시절 미술학원에서 배워야하는 수업을 다시 듣는 기분이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다 아신다는 듯 말씀하셨다.


‌ "그냥 타블렛으로 그림이나 그리지 자꾸 이런 이론수업을 계속 하느냐고 생각이 되죠? 그런데 사칙연산을 모르는데 수학문제를 풀 수 없듯이 그림의 기본을 모르는데 그림을 잘 그릴수가 없어요. 단지 도구가 바뀌었을 뿐 결국 타블렛을 이용한 드로잉도 그냥 그림 그리잖아요? 기본을 알아야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여러분들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중이니 조금만 참아줘요."  


 이렇듯 그림의 '그' 자도 모르는 채 수업에 참가한 우리를 응원하는 선생님의 말은 수업내내 이어진다. 기본 중에 기본만 알려주신다고 하시지만 이게 기본이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 싶은 어려운 이론수업들이 듣고 있자면 동공이 풀려가기 시작한다. 그럴때면 어김없이 수업을 포기하지 말라며 중간중간 ‌선생님의 사담이 이어진다. 물론 이런 사담을 ‌듣다보면 '심심한데 그림이나 그려볼까?'라는 과거 얄팍한 내 마음에 혀를 내두르고, 그림은 아무나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간다는 걸 선생님은 아실까 모르겠다. 


‌#1
- 선생님 : 자, 이제 이해가 되나요?
‌- 나 : 이해는 되는데 실제로 그리려면 잘 못하겠어요.
‌- 선생님 : 
 그래서 제가 방법을 알려드리는 거죠. 제대로 된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차차 잘 그릴 수 있을 거예요. 이래서 그림은 많은 공부가 필요해요. 안경을 잘 그리고 싶으면 다양한 안경을 찾아보며 다양한 특징을 알아가야 하고, 사람 한 명을 그릴 때도 치마를 입고 앉았을 때 다리와 맞닿는 쪽의 치마길이는 짧아지고 반대부분은 조금 길어진다는 특징을 알아채야 하죠. 그래서 그림 하다가 도망가는 사람들 많아요. 그냥 그림만 그리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공부할 게 많은 줄 몰랐던 거죠. 

‌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계속 연습하다 보면 저보다 더 잘 그리게 될 거예요. 이때까진 방법을 몰랐을 뿐이니까요. 많이 찾고, 많이 보고, 많이 그려봐요.

‌#2
‌ 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겸손을 떠느라 그러는 게 아니라 세상에는 정말 날고 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니 어떻게 이런걸 그림으로 그려내지?'라는 감탄이 나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는 직접 봐 왔어요. 그런 괴물들을 가르쳐보기도 했죠. 그래서 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답니다.

#3
‌ 여러분 타블렛 잘 다루고 싶죠? 타블렛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그냥 그림을 잘 그리면 되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연필로 그리든, 타블렛으로 그리든 그냥 잘 그리더라구요. 예전에 제가 어떤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어요. 저는 엄밀히 말하면 그림을 잘 그린다기 보다는 포토샵 툴을 잘 다룬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 선생님께 툴 사용법을 알려드렸더니 너무 놀라면서 좋아하시는 거예요. '아니 이런 방법으로 그릴 수 있는 거였나요?' 하시면서요. 저는 오히려 그런 선생님의 반응이 ‌너무 놀라웠어요. 이런 기능을 하나도 안 쓰시고 이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요.‌


이번주로 타블렛을 이용한 그림그리기 수업을 들은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다.

 수업을 들을 때면 자괴감이 심하게 생겨온다‌. 이 똥손을 어찌하면 좋을지, 다른 사람들은 잘 그리는데 내 그림실력은 왜 이런지. 그렇기에 수업을 들을 때면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시는 것이 부끄럽다. ‌밥아저씨처럼 '참 쉽죠?'라는 느낌으로 5분 컷 드로잉을 보다가 그걸 직접 그려야하는 시간이 오면 쥐구멍에 숨고 싶은 내 마음을 아실라나 몰라.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수업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다. 매주마다  뒤에서 내가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시다 고요히 '잠깐 볼까요?'라고 말하는 순간은 항상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선생님의 설명으로 재탄생하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도 한다. 초등학생 때도 그림이 내 맘처럼 안그려져서 많이 울고, 선생님이 다 고쳐주셨었는데.

내가 처음 그린 밑그림에서 진짜 사람 모습이 되어가는 과정.
원본을 최대한 살리면서 수정하겠다는 선생님의 손길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2번째 그림은 내가 그린 그림을 하나도 지우지 않고 포토샵 올가미 툴로 자르고 붙여넣기만으로 수정된 그림이다.

이렇게 부끄럽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면서 계속 수업에 나가는 이유는 ‌힘들지만 수업을 듣고난 후의 내 모습이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이 일을 통해 그려나갈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보고는 한다. 그 모습이 기대되는 모습들로 그려지면 일을 시작하자는 마음을 먹는다. 그렇기에 시작한 일을 그만두게 되는 이유 역시 동일하다. 미래의 모습을 그렸을 때 전혀 기대가 되지 않으면 나는 그 일을 그만둔다. 

 타블렛 수업은 듣는 내내 부끄러운 내 실력에 숨고 싶지만, 수업을 들을수록 그 다음 수업이 기대가 된다‌. 물론 수업 중간중간 말씀해주시는 선생님의 말을 듣는 것도 좋고, 칭찬을 들을 기회가 없어져가는 나이에 저번보다 좋아졌다는 선생님의 칭찬을 듣는 것은 덤이다. 이 수업을 통해 드로잉을 많이 배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림그리기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걸 배우는 중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한 달이 더 남았다. 여전히 사람 그리기는 너무 어렵고, 우리는 전문반이 아니기 때문에 기본 중에 기본만 알려주시는 것인데도 머리가 팽팽 돈다. (그림을 그리는데 머리가 아파ㅠㅠ) 인간에게 근육은 왜 이렇게 많은지, 대칭은 누구나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왜 나는 항상 비대칭인지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수업에 나가보려 한다. 한 달 뒤면 또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져 있을 거라는 기대가 되니 말이다.